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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출근하기조차 겁이 날 지경입니다
 오마이뉴스  | 2011·12·19 10:44 | HIT : 1,632

회사에 출근하기조차 겁이 날 지경입니다

   [공모-올해 내가 뽑은 인물] 현대미포조선 정규직 노동자 김석진씨
    
몇 달 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취재하면서 알게 된 연락처로 김석진씨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저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분의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김석진씨는 진보진영 추대로 시의원과 국회의원에 출마한 경력을 갖고 있는 현대미포조선의 정규직 노동자입니다. 그때 연락처는 몰랐습니다.

어느 날 어떻게 알았는지 제가 현대차 앞에서 부당해고와 불법파견 정규직화 1인시위하고 있을 때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격려차 오셨다며 현대차는 불법파견이고 대법원에서 판결 난 거니까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정규직화에 꼭 승리하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일로 인연이 닿아 그분 이야기를 한 차례 <오마이뉴스>에 기사로 올리면서 서로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때 보니 김석진씨는 정말 인간다운 면모를 갖고 있었습니다. 겸손하며 자신보다 못한 위치에 있는 노동자의 억울한 일이 있으면 앞장서 해결해 주고자 노력하였고, 불법파견과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김석진씨야말로 노동자의 참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복직 하던 날현대미포조선 노동자
김석진씨는 지난 1997년 4월 14일 부당해고 당한 후
대법원까지 간 결과 승소하여 2005년 8월9일 복직합니다.
그러나 그의 여정은 다시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김석진씨를 '올해 내가 뽑은 인물'로 선정해 <오마이뉴스>에 올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헌데….
"변창기 동지, 제가 지금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거 같네요. 또, 아내가 저보다 더 아파서 우리 집에 초대하기도 그렇네요. 다음에 합시다."
김석진씨에게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김석진씨 집으로 가서 가족과 함께 사는 모습도 담고 아내가 말하는 남편 이야기도 듣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못한다"니요? 그간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정신이 오락가락까지 할까요? 더구나 "아내가 저보다 더 아프다"니요? 저는 뭔가 심각한 상황이 흐르고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럼 김 형이라도 잠시만 좀 봅시다"고 거듭 부탁했더니, 그제야 그러자 했습니다.



정신장애로 고통받고 있는 김석진 노동자.
김석진씨는 가방에서 약을  한보따리 꺼내 놓았습니다.

저는 일을 마치고 김석진씨와 약속한 장소로 나갔습니다. 김씨는 동네 어느 식당으로 저를 안내했고,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 싸들고 온 약을 한 보따리 꺼내 놓았습니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제가 요즘 우울증과 노이로제가 심해져서 이렇게 약을 한주먹씩 먹고 있어요. 이거라도 안 먹으면 망치로 머리를 치듯이 아프고 심란해져서 밤마다 잠을 못 이루어요. 이 약이라도 안 먹으면 정신이 오락가락해요. 지금 이렇게 있어도 몸이 힘든 상태예요. 이해해 주세요." 몇 달 전 취재할 때도 언뜻 우울증 약을 먹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으나, 그땐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보냈습니다. 몇 달 후 다시 만난 김석진씨는 전보다 더 많이 야위어 보였고, 약도 전보다 더 많은 양을 먹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김형의 살아온 이야기를 꼭 <오마이뉴스>에 올리고 싶거든요. 힘들겠지만 제가 이메일로 질문을 드릴 테니 간단하게 답변을 이메일로 보내주세요. 그리고 사진 몇 장만 보내주세요."

더이상 대화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날은 간단히 저녁만 먹었고, 저는 포기할 수 없어 나오면서 조심스레 다시 부탁했습니다. 저는 김씨에게 이메일 주소를 알려달라 해서 적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살아온 이야기에 대해 질문서를 만들어 이메일로 보냈습니다. 아랫글은 김석진씨가 보내온 서면 질의에 대한 답변 메일을 정리한 것입니다.



김석진과 근무 할수 없다?김석진씨가 일하는 현장 사무실 앞에
저런 문구가 현수막으로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2009년 2월 16일부터 2009년 9월15일까지

- 태어나고 미포조선 입사 전까지 과정을 간단히….

"저는 1961년 1월 중순에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는 큰 방앗간을 운영하셨어요. 어쩌다가 재산을 다 날려 버렸답니다. 자세한 것은 저도 잘 모릅니다. 어머니 등에 업혀 경주로 이사 왔고, 5살 정도 되어서 깊은 산중 외딴집에서 살았던 기억이 납니다. 멀리 동해가 바라보이는 산 중턱에 우리 집이 있었지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까지는 20여 리 정도 되는 걸로 기억합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머리를 깍지 못해서 어깨까지 머리카락이 길었기 때문에 가끔 산길을 지나가는 어른들이 여자아이인지 남자아이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습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웠고, 한자를 보지 않고 외우고 쓰고 뜻풀이할 정도로 '마스터' 하고 입학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후 3학년까지는 산에서 2시간 정도 걸어서 학교에 다녔어요."  

- 많은 기업 중에 미포조선 들어간 이유?

"저는 1980년 울산에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당시 '조국근대화의 기수'라며 졸업 후 2급 기능사 자격증을 따서 취직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주변에서 이야기하고, 대학 갈 생활형편이 못 되어 공업고등학교로 진학했습니다. 입학 후 1년이 지난 뒤 저는 '국제기능 올림픽대회'에 나가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배관 부분인데 고등학교 2학년 때 경남지방 학생기능경기대회에서 3등을 하기도 했지요.

3학년 때는 1등을 하면서 그 당시 울산문화방송 라디오에서 며칠간 뉴스시간에 제 이름이 나오기도 했어요. 전국대회 본선 출전권을 받으려면 일반인들도 참가하는 경남지방 기능경기대회에서 먼저 3등 안엔 들어야 하는데 학생신분으로 출전은 했으나 대기업 아저씨들이 1, 2, 3등을 싹 쓸어 가고 저는 4등 장려상을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졸업 당시 저의 배관 부분 담당 선생님이 대기업에 취직하면 좋을 거 같다고 추천을 해주셔서 현대미포조선으로 실습을 나가게 되었지요. 국제기능 올림픽대회에 나가 시상하게 되면 취업시 많은 혜택을 주던 시절이었는데, 기능대회를 포기하고 미포조선에 취업해 다니다 보니까 이렇게 31년째 다니고 있네요."

- 노조활동은 언제부터 관심 가졌고, 어떤 활동을 주로 해 왔는지….

"87년 노동자 대투쟁 초기 저는 노동운동이 무엇인지도 깊이 있게 잘 몰랐습니다. 처음에 미포조선 노조 1대 노조체육부장을 맡고부터 지역의 여러 단체로부터 교육도 받고 학습도 하면서 조금씩 제대로 된 노동운동이 무엇인지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1980년 입사했으니까 그 당시엔 경비들에게 바리깡으로 머리를 잘린 경우도 있었고, 고과점수에 의해 상여금과 임금 인상에까지 심각한 손해를 보기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87년 이전 대부분 노동자들이 겪은 일들을 저도 같이 겪었습니다. 풍물패, 노조대의원, 현장조직 의장을 지냈구요. 저는 주로 현장활동에 치중해 왔어요."  

- 해고된 날 이후 삶의 어려움….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저는 해고되기 전부터 혼자 벌어서 두 집 살림을 살았습니다. 지금도 두 집 살림을 살고 있구요. 가족 중 혼자 사시고, 지병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는 형님 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의 생활비도 제가 책임져야 할 상황이거든요. 저는 1997년 4월 14일부터 해고되어 2005년 8월 9일 복직되었습니다(해고기간이 무려 8년 4개월입니다). 해고되고 난 후 어머니는 늘 저에 대한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3년 7개월 동안 식물인간으로 지내시다 저의 복직도 못 보시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는 코에 호스를 통해 음식물을 넘기셨고 목을 뚫어 가래를 뽑아내고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습니다.

아내가 저보다 더 힘든 생활을 해왔습니다. 숨을 제대로 쉬게 하기 위해서는 흡입 기계로 목구멍에 가래를 거의 30분마다 뽑아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집에다가 중고 병원침대, 가래뽑는 흡입기계를 구입해 병원의 병실처럼 똑같이 만들었어요. 제일 힘들었던 것은 주·야 24시간 중 30분마다 기계로 가래를 뽑아야 하니 아내와 저가 돌아가면서 매일 밤을 꼬박 새워야 했던 일입니다. 두 집 살림을 살랴, 7살 10살 되는 두 딸 키우랴, 시어머니 병간호하랴, 회사 앞에서 180여 일 동안 철야노숙과 43일간 단식투쟁하는 남편 돌봐주랴, 남편의 복직투쟁 지지연대를 위해 지역집회에 가서 호소하랴…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시엔 이것이 지옥인가 싶었습니다. 경제적 궁핍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습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내에게 할 말이 없습니다. 너무 고생을 많이 시킨 거 같아 미안한 생각뿐입니다."  

- 구속된 후 국회의원에 출마한 적 있죠? 어떻게 해서 출마하게 되었고 그 과정 간단히 설명해주세요.

"복직투쟁 과정에서 구속되지는 않았고 경찰서 유치장에서 며칠 지내다 나왔어요. 진보진영의 도움으로 해고기간 울산광역시의원으로 출마,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에 2차례 출마한 경험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노동탄압과 비정규직 철폐 정규직화를 알려내기 위해 해고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출마하였던 것입니다."  

- 대법원 판결이 나고 복직된 후 삶에 대해….

"복직판결의 기쁨은 일순간뿐이었습니다. 복직 후 단체협약관련 회사와 소송이 벌어져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어 벌어진 사내하청 용인기업 복직 연대투쟁으로 민사소송, 형사소송, 벌금, 회사의 중징계, 노조의 중징계, 계속되는 병원치료에 하루하루가 힘겹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 지금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요?

"현대중공업 경비대 심야테러를 해결하라며 3년째 현대중공업을 상대로 현장투쟁, 홍보물배포, 1인시위를 하며 싸워오고 있습니다. 아내와 두 딸도 함께하고 있는데 대기업도 저를 외면하고 현장 반원도 저를 외면하는데 가족이라도 함께해주니 그나마 힘이 납니다."

-건강상태가 심각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난 2009년 1월 17일 현대중공업 경비대 심야테러를 당한 후 3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우울증과 수면장애 등이 생겨 매일 3시간 정도라도 자고 싶은데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전부터인 2009년 6월경부터 지금까지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버티어 오고 있지만 갈수록 더 힘들어지네요. 2010년 2월경까진 수면제만 복용하며 지내왔으나 점점 증세가 악화되어 2010년 3월부터는 약을 한주먹씩 먹고 있는 중입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병가휴직을 내고 병원요양치료를 받으려고 합니다. 아내 또한 저와 비슷한 증상이 진행되어 정신과 치료와 약물을 복용하고 있습니다. 회사가 저에게 무슨 원한이 있길래 저를 이렇게까지 고달프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시달려 이젠 회사에 출근하기가 겁이 날 지경이랍니다."



그의 억울함 호소 얼마나 억울했으면
가족까지 나섰을가요?

현대미포조선 노동자 김석진씨가 증언한 시달림 사례들

1. 2008. 12. 25.
김석진소속 반원들중 4명은 김석진의 노동운동으로 반원들의 고용이 불안하다며 김석진을 반에서 퇴출시켜야 한다. 함께 근무할 수 없다는 편지를 김석진에게 보냄.
부서장은 이 편지를 근거로 김석진을 면담하였고 법률적 검토를 거쳐 특단의 조치를 위하겠다고 김석진에게 말함 (편지 4통 보관)

2. 2008. 12. 30.
김석진소속 반원 6명이 간담회를 하여 김석진이 제조직에서 탈퇴하지 않으면 함께 근무할 수 없다는 결의문을 작성하여 김석진에게 보여줌 (결의문 내용보관)

3. 2009. 4월부터
노무관리자들 이른 새벽부터 김석진의 자택감시와 외출시 차량으로 미행함(차량미행은 현대자동차노조 영상팀에서 찍은 동영상을 증거로 보관)

4. 2009. 5월부터
출근시 출입문에서 현장사무실 입구까지 사내에서 경비대가 미행함 (사진 보관)

5. 2009. 2 - 2009. 9.
김석진소속 팀원들 명의로 김석진을 비방하는 3개의 현수막을 김석진이 출근하는 현장사무실 입구와 주변에 설치함. (사진보관)

6. 2009. 7월경
김석진이 작업시 자신을 비방하는 현수막에 둘러싸여 작업을 함 (사진보관)

7. 2009. 6.- 2011. 12 현재까지
김석진의 고유업무가 바뀜 (증거로 매일 작성하는 개인 작업일지 보관)

8. 2009. 2.- 2011. 12 현재까지
김석진이 매월 내는 팀회비를 팀에서 내지 말라고 하여 납부가 중단된 상태임.
팀회비는 팀원들간의 송년회, 회식비 등으로 사용되며 김석진이 팀회비를 내지 않음으로써 팀원들간의 모임에서 제외됨. 이는 바로 팀원들간에 행하여지는 야유회나, 길, 흉사시에도 불참으로 이어졌고 출,퇴근시 팀원들과 서로 인사나 대화를 하지 않게 됨. 결국 왕따가 됨.

9. 2009. 5월경부터
김석진의 상급자 담당반장이 점심시간 감시 목적으로 식당에 동행함. 담당 반장은 자의반 타의반 동행한다고 함 (음성녹음 보관)

10. 2009. 6월경
출근길 사내에서 김석진과 걸어가다 김석진과 말을 걸었다는 이유로 모 조합원이 자신의 상급자로부터 질타를 당했다며 같이 걸어가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함 (음성녹음 보관)

11. 2011. 11월경
김석진의 상급자 조장이 점심시간 감시, 미행함 이에 항의하자 점심시간 안전사고예방을 위해 감시, 미행했다고 함. (감시, 미행 사진 및 음성녹음 보관)



일하다 사망한 하청노동자 추도제
김석진씨가 현장에서 일하다 사망한 하청노동자 추도사를
하려하자 회사 관리자들이 몰려와 못하게 막았다고 합니다.

김석진씨를 취재하면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습니다.

기사에 올릴 사진을 보다가 추도사하고 있다는 내용의 사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김석진씨에게 다시 전화로 알아보았습니다.
"추도사가 뭐고 왜 하게 되었나요?"
"추도제는 돌아가신 분 넋을 위로하는 글을 읽는 것입니다. 제가 추도제를 하게 된 것은 돌아가신 분이 너무도 억울하게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회사에 사내하청으로 지난해 7월 말경에 들어온 젊은 분이 한 분이 계셨지요. 나이가 35살이라 합디다. 그 분이 배 용접 하기 전에 다리를 놓는 족장이라는 작업을 수행하는 중에 올 11월 4일 14시경에 압착사고가 일어나 그자리서 사망했어요. 소식듣고 조문을 가 유가족을 만나 뵈었습니다. 결혼 한 지 두 달 되었고 아직 혼인신고도 하지 못한 아내가 계시더군요. 얼마나 안타깝고 억울하게 여겨지던지 제 마음이 다 아파 왔습니다. 안되겠다 싶어 '나라도 나서 추도제라도 올려 드리자'고 해서 17일 12시 점심시간을 이용해 미포조선 내 민주광장이란 곳에서 추도사를 한 것입니다."

김석진씨 혼자서 진행한 추도제는 회사 노무관리자들에 의해 가로 막혔다고 합니다. 그를 에워싸고 못하게 하는 가운데 김석진씨는 큰 소리로 미리 준비한 추도사를 읽어 나갔습니다. 회사 노무관리자들이 그가 가진 추도제 도구를 빼앗으려 하자 주변에 있던 하청노동자들이 야유를 퍼부으며, 또 김석진씨에게는 박수를 보내 주었다고 합니다. 또, 두세 명의 정규직 노동자도 노무관리자에게 항의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회사 노무관리자들이 뒤로 한 발 물러서더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추도제는 잘 치러냈다고 합니다.

저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김석진씨가 매일매일 받았을 스트레스를…. 또 가족이 받았을 스트레스를…. 제가 지켜본 김석진씨는 '내가 뽑은 올해의 인물'에 소개할 정도로 흔히 말하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현대미포조선이라는 기업은 왜 김석진씨를 그리도 심하게 괴롭히고 있을까요? 심성 고운 이 사람이 왜 그토록 극심한 시달림을 받으며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김석진씨는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고 고달파서 출근하기가 어렵게 되어 12월 5일 요양휴가를 낸다고 합니다. 미포조선 하청노동자가 찍었다는 추도제 사진을 한참이나 바라보았습니다. 사진 속 김석진씨가 이렇게 외치고 있는 거 같았습니다.

"재벌기업의 권리만 중요하고 노동자 권리는 중요하지 않습니까? 회사 대표와 노동자는 동등한 입장 아닙니까? 우리가 그에게 머리 조아리며 살 이유가 무엇입니까. 노동자도 사람이고 회사 대표도 사람입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습니다. 노동자에게 부당하게 대하는 데도 가만히 있는 것은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를 버리고 노비의 삶을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노동자가 왜 회사의 노비로 살아야 합니까?"

김석진씨 아내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었으나 건강문제로 가정 방문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저는 조심스레 김석진씨에게 "그러면 회사 대표에게 바라는 글이라도 써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아내도 회사 노무관리자에게 얼마나 당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아내가 쓴 내용 원본 사진입니다.



김석진씨 아내가 현대미포조선 대표에게
보내는 글 원본 사진

덧붙이는 글 | '올해 내가 뽑은 인물' 응모글입니다.

[아래 내용은 민주노총이 정몽준 국회의원에게 보낸 항의서한 내용 중 발췌한 것입니다]

김석진 노동자에 대한 현대중공업 경비대의 심야 테러사태의 전모는 다음과 같다.  

2009년, 1월17일 23시 30분경, 오토바이 헬멧으로 복면한 현대중공업 경비대 50~60여명이 소화기와 쇠파이프, 각목 등으로 무장하고 현대중공업 소유 소각장 옆 인도에 설치된 농성장을 쳐들어와 소화기를 뿌려 앞을 볼 수 없도록 만든 후, 취침준비를 하는 김석진 노동자를 지목하여 집중적으로 테러를 가하였으며 김석진씨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되자 농성물품과 수대의 차량을 부수고, 농성장 주변 물품 모두를 불태워버리고 도주한 사건이다.
당시 그 주변에는 전경차 1대와 30여 명의 경찰병력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불법테러를 자행하고 있는 현대중공업 경비대를 제지하거나, 현행범으로 체포하지도 않았으며 심야테러 몇 시간 후 경비대들은 경찰들이 보는 앞에서 승용차 20여대를 나눠 타고 유유히 공장문을 빠져 나갔다.


*인터넷을 검색해 정신장애의 종류를 알아 보았습니다.

[정신장애 종류]

현대미포조선 노동자 김석진 씨는 회사 쪽의 비난, 비방, 협박, 미행, 감시를 십수 년간 받아 오면서 심각한 정신장애가 생긴 듯 보입니다. 취재하면서 보니 김석진씨는 불안, 공포, 두려움이 많아 보였습니다. 몸무게도 몇개월 전에 비해 많이 빠져있었고 초췌한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필자는 인터넷을 검색해 정신장애 종류에 대해 알아보니 많은 종류가 있었습니다. 아래는 그 내용입니다.

국제질병분류(ICD)와 미국정신의학회분류(DSM)이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DSM은 크게 정신질환을 1. 치매, 섬망등의 인지기능장애 2. 중독장애 3. 정신분열병등 정신병적 질환 4.정동장애 5. 불안장애 6. 신체화장애 7. Factitious Disorder 8. 해리성질환 9. 성기능장애 10. 섭식장애 11. 수면장애 12. 충동조절장애 13. 정신신체장애 14. 적응장애 15. 인격장애 16. 소아의 정신질환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각각의 영역의 진단명은 대충 다음과 같습니다.

2011.12.05 11:05 ⓒ 2011 OhmyNews  변창기 (byun21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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